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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의 끝, 관산성 전투의 배경과 성왕의 죽음까지

한국사

by Renopark 2016. 8. 2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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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는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 지역에서,

554년에 벌어진 전투이다.



관산성(파란점)에서,

백제의 태자 부여창(훗날 위덕왕) 이끄는 

백제, 대가야, 연합군과

신라 진흥왕의 군대가 맞붙게 된다.



결과


-신라군 승리

-백제 성왕 전사(백제 왕권 약화)

-'고구려 견제'의 백제 정책이 신라로 향함.

-백제의 대가야 영향권 상실 이후

-신라가 대가야 병합(가야 멸망).




배경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신라가 맺은 동맹이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는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펼치자


433(~553까지)

(한성)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는다.

당시 고구려는

19 광개토왕(391~413) 이후

영토 확장과 함께 안정과 내치 그리고

남진정책을 펼친 

20 장수왕(413~491)에서부터 

23 양원왕(545~559) 치세 기간이다.


475,

백제는 장수왕이 이끈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현재의 서울 송파 위례성) 함락 되었고,

개로왕이 피살된.


538년,

백제의 부여 천도(성왕).

수도 및 지방 행정 정비한다.


551년, 

백제의 성왕와 신라의 진흥왕의 연합군은

남평양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권역을 확보한다.

이에 한강의 중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 과거 한성 백제 시대의 고토는 백제가

분할 점령하게 된다.



6세기 중반

고구려는 요하강(요동-요서의 경계) 지역에서

중국 북방의 돌궐과 대치중이였고,

내부 권력 다툼으로 외부 침입에 취약한 상태였다.


552,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와 몰래 동맹을 맺고,

553,

신라는 백제를 기습공격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녹색원)을 빼앗는다.

이로서 

신라는 중국과 해상으로 더욱 가깝게 교역할 있는

당항성(경기도 화성) 확보하게 된다.


554,

백제의 성왕이은 태자 부여창을 사령관으로

왜군, 대가야의 연맹군을 동원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하지만, 관산성 인근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호대 50명을 대동하고 방문한 성왕이

신라의 장군 도도(충북 보은-삼년산성 주둔)에게 잡혀 피살되고,

백제군이 전멸하다시피 패배하게 된다.

이후 부여창이 즉위(557)까지  3년간 백제의 왕은 공백상태가 된다. 




지리적 특징 : 관산성의 입지


위의 충북 옥천의 입지를 보면,

소백산맥의 왼편이며

대전에서 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으로 벗은 대전통영고속도로 등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관산성(빨간원)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도로가 뻣어나가는 지역을 관망할 있는 입지이다.




관산성은

당시 서쪽의 부여와 

불과 (5~60km) 안에 있는 지역이자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넘어가는

교두보로서 향후 신라를 공략하기 위해서

가치가 높은 지역이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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